수유동 변두리의 낡은 재봉틀 한 대에서 출발한 작은 봉제 공장이 이탈리아와 일본의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을 차례로 꺾고 세계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한 편의 잘 짜인 영화와도 같다. 홍진HJC가 십수 년간 전 세계 오토바이 헬멧 시장을 굳건히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복잡한 경영 이론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면서도 지독한 집념에 있었다.
그들은 눈앞의 얄팍한 이윤을 좇는 대신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의 해자를 파고 또 파내려 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업 총매출의 10% 이상을 무조건 연구개발에 쏟아부은 광기에 가까운 고집은 2007년 경기도 용인에 지어진 첨단 풍동 실험실로 그 결실을 맺었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레이서가 맞닥뜨리는 엄청난 공기 저항과 고막을 찢는 소음을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들여 바람의 길 자체를 실험실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남들이 길거리에서 운전자의 감각에 의존해 주먹구구식으로 제품을 테스트할 때 이들은 조용한 과학의 영역에서 생존과 퍼포먼스를 정밀하게 조율했다. 이러한 기술 집착증의 배경에는 창업주 홍완기 회장의 타고난 발명가적 기질이 짙게 깔려 있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낡은 제도판 앞에서 도면을 그렸던 그는 일상의 아주 작은 틈새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주행 중 담배를 피우거나 동료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헬멧 전체를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관찰하고 이동형 턱 보호대를 고안해 유럽 시장에서 대히트를 쳤으며 극한의 추위 속에서 입김 때문에 헬멧 유리에 김이 서려 시야가 캄캄해지는 치명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리에 미세한 열선을 까는 기발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토바이 헬멧의 영역을 넘어 극심한 도심의 교통 체증을 단번에 해결해보겠다며 조립식 고가도로 공법을 개발해 제네바 국제발명품대회 금상까지 거머쥐었으니 이 회사의 핏줄 자체에 끊임없이 기존의 틀을 부수고 사물을 다르게 보는 혁신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 기업사에서 가족 경영이란 종종 불투명한 지배구조나 족벌의 폐해라는 부정적 뉘앙스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 회사의 거대한 성장 엔진은 다름 아닌 혈육의 끈끈하고 이타적인 헌신이었다. 충남 논산 출신의 일곱 형제 중 다섯 명이 각자의 타고난 성향에 맞춰 연구개발과 해외 영업 그리고 재무와 생산 라인을 명확하게 분담하며 어긋남 없이 회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낡은 영한사전 하나를 품에 안고 미국으로 건너가 온몸으로 까다로운 현지 안전 인증을 받아낸 형제의 고군분투 이면에는 기업의 숙명을 위해 바친 뼈아픈 희생이 깊게 새겨져 있다. 눈 덮인 캐나다 현지에서 스노모빌 헬멧의 한계를 직접 테스트하던 막내동생이 균형을 잃고 정면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극은 남은 가족과 임직원들의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흉터를 남겼다.
하지만 그 끔찍한 절망은 곧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결점 없는 완벽한 헬멧을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사명감으로 타올랐고 혈육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소중한 데이터는 세계 1위라는 금자탑을 굳건히 떠받치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로 승화되었다.
창업주는 스스로의 회사를 빚 없고 노사 분규 없으며 불량품이 없는 삼무(3無)의 기업이자 세계적 브랜드와 1등 제품이 있고 모든 직원에게 집이 있는 삼유의 조직으로 자랑스럽게 정의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돈을 버는 것보다 거래처와 내부 종업원에게 일절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굳은 철학 아래 무주택 직원들에게 무이자로 주택 자금을 흔쾌히 빌려주거나 쉴 수 있는 사원 주택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직원들의 팍팍한 삶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었다.
안전 장구 분야에서 세계의 정점을 찍은 이들의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은 오토바이 본품 자체를 생산하는 이업종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이어지며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만성 적자에 시름하던 효성기계를 전격적으로 인수해 여의도의 화려한 사무실을 창원 공장으로 가차 없이 통폐합하고 자사의 빼어난 헬멧 도장 기술을 오토바이 차체에 덧입힌 신형 스포츠바이크를 세상에 내놓았다.
회사의 대표가 직접 대형 트레일러의 운전대를 잡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맹렬하게 세일즈를 펼친 끝에 죽어가던 만성 적자 기업을 단숨에 흑자로 돌려세우고 전략적으로 매각한 일화는 이들의 지독한 제조 경영 능력이 단일 품목을 넘어 거대한 기계 공업의 영역에서도 완벽하게 통한다 것을 여실히 증명한 통쾌한 실험이었다.
철저한 무차입 알짜 경영으로 평소 체력을 단단히 길러온 이들에게도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키코 파생상품 사태는 30년 공든 탑을 뿌리째 흔드는 파멸적인 재앙과도 같았다. 매년 건실하게 흑자를 내며 승승장구하던 우량 기업이 걷잡을 수 없는 환율 폭등의 덫에 걸려 단 한 해에만 1300억 원이 훌쩍 넘는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니 일반적인 중소기업이었다면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 되었을 것이다.
까마득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을 지옥에서 건져 올린 것은 한 줄기 요행이나 기적이 아니라 30년 넘게 미련할 정도로 정직하게 쌓아온 압도적인 글로벌 시장 지배력과 티 없이 깨끗한 펀더멘털이었다. 비 올 때 우산을 뺏는다는 냉혹한 은행단조차 이것이 일시적인 금융 쇼크일 뿐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본업의 막강한 경쟁력과 현금 창출 능력은 털끝만큼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인정했고 12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빚을 회사의 주식으로 통째로 바꿔주는 대규모 출자전환을 전격 결단했다.
오염되지 않은 기술의 본질과 절대적인 시장 장악력이라는 진짜 무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채권단마저 강력한 우군으로 돌려세우며 치명적인 위기를 오히려 영속의 자산으로 치환해버린 것이다. 기사회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들은 저렴하고 튼튼한 가성비 브랜드라는 오래된 꼬리표를 미련 없이 떼어내고 진정한 명품으로 거듭나기 위해 또 한 번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들었다.
수십억 원의 뭉칫돈을 과감히 투입해 개발한 초경량 탄소섬유 복합소재로 무장한 알파 시리즈를 보란 듯이 세상에 내놓으며 콧대 높은 유럽의 프리미엄 레이싱 헬멧 시장의 심장부를 정조준했다. 수익성을 높이려 해외 공장을 쉴 새 없이 돌리는 와중에도 브랜드의 자존심인 최고급 라인만큼은 인건비가 비싼 한국 본사에서 숙련된 장인들이 직접 조립하고 수작업으로 깐깐하게 검수하는 결벽증을 고집한 끝에 일본 브랜드들이 오랫동안 편안하게 독식하던 최상위 시장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다.
거기에 더해 모터스포츠의 F1이라 불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모토지피 대회를 공식 후원하며 시대를 풍미하는 최정상급 챔피언들의 머리에 홍진HJC의 헬멧을 당당히 씌웠고 마블이나 디시 코믹스 같은 글로벌 대중문화 아이콘의 화려한 캐릭터를 헬멧에 입히며 경쟁사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독보적인 브랜드 헤리티지를 촘촘하게 엮어 나갔다.
시대의 거대한 바람을 읽고 그 위에 유연하게 올라타는 감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연기관의 모터사이클을 넘어 자전거 헬멧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토로 거침없이 확장하는 강력한 기폭제로 작용했다. 시속 300킬로미터의 가혹하고 폭력적인 주행 환경에서 라이더의 생명을 지키며 켜켜이 쌓아 올린 공기역학 설계와 충격 흡수 노하우는 친환경 레저 시대의 도래에 맞춰 바람의 길을 자연스럽게 열어젖히는 첨단 자전거 헬멧으로 완벽하게 이식되었다.
헬멧 내부의 공기 흐름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라이더의 소중한 체력을 아껴주고 아스팔트 위로 넘어질 때 뇌로 전달되는 치명적인 회전 충격을 부드럽게 분산시키는 혁신적인 기술력은 그들이 오랜 세월 뼈를 깎아 축적해 온 본원적 핵심 역량이 시대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맞춰 얼마든지 새롭고 화려하게 변주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낸다.
과거 남의 거대한 유통망을 빌려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하청업체의 달콤한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고난의 흙길을 걸으며 자기만의 이름을 개척한 선구적인 인내심 그리고 얄팍한 마케팅 기교 대신 우직하고 집요하게 기술의 단단한 성벽을 쌓아 올린 뚝심은 오늘날 다시 보아도 경탄을 자아낸다. 만성적인 저성장의 늪과 글로벌 공급망의 잔혹한 패권 경쟁 속에서 뚜렷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기업들에게 이 회사가 반세기 동안 조용히 걸어온 발자취는 흔들리지 않는 경영의 나침반이자 살아 숨 쉬는 혁신의 교과서가 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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