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제작 소식이 공개되자 몇몇 여성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중년 남성과 20대 여성 사이의 로맨스를 빙자한 그루밍 성폭력을 미화할 우려가 있는 작품이라는 게 요지였다.
그런데 당시 공개된 정보는 남녀 주인공의 기본적인 프로필 정도였다. 즉 드라마의 구체적인 시놉시스는 공개조차 되기 이전이었던 것. 정작 본편이 공개되자 진행된 내용은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연애담 따위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고, 비판하는 쪽에서 거론했던 그루밍 성폭력 운운도 까무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난리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이를 둘러싼 평가도 분분하다. 그 중 문득 눈에 띄는 건 학생에 대한 폭력을 합리화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류의 비평이었다. 그리고 이 비평의 첫 문장에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몇몇 쇼츠를 통해 본 바에 의하면'. 이미 본편이 모두 공개된 드라마임에도 그냥 본편 안 보고 쇼츠만 본 뒤에 드라마의 내용을 '단정'짓고 그에 대한 평론을 썼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직 이 드라마를 보는 중이다. 한 5편까지 봤던가. 그러나 <참교육>이 그 시절 우리가 겪었던 교사에 의한 무제한적인 폭력을 긍정하거나 그 시절을 추억하는 드라마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대응 불가능한 학생이나 학부모, 교사에 대한 초법적인 - 그리고 동시에 철저한 상상의 산물인 - 기관으로서의 교권보호국, 이 등장할 따름이다.
<배트맨>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는 정상적인 공권력으로는 제대로 된 치안 유지가 불가능한 환경이다.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재력과 지위를 '악용'하여 스스로를 초법적인 자경단으로 지정하고 경찰이 대응하지 못하는 범죄자들을 때려잡으러 다닌다. <배트맨>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 법이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악에 대한 물리적 대결이 주는 쾌감이자, 동시에 현실에도 존재하는 중과부적인 악에 대한 응축된 감정의 발로에 가깝다. 현실에서도 법이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악은 존재한다는 감각이 대중 사이에 폭넓게 작동하고 있으니 이런 콘텐츠가 흥행할 수 있는 것이다.
<참교육>의 교권보호국이 딱 그런 존재다. 이런 조직 혹은 나화진 감독관과 같은 캐릭터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시청자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컨셉이 호응을 얻는 건, 그만큼 기존의 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풀어낼 방법을 찾아낼 수 없는 '악'의 존재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악을 처단하기 위해 교권보호국이나 배트맨과 같은 '필요악'을 등장시킨다는 것, 따지고보면 대중서사에서는 퍽 오래된 클리쉐이기도 하다.
<배트맨>을 보면서 범죄조직을 체계적으로 응징하는 자경단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참교육>을 보면서 8-90년대 '우리'가 당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교내 폭력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기꺼이 없애고자 했던 교내 폭력이 이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또다른 선의의 피해자를 낳고 있다는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며, 이 모순을 대응할 만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존재한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그냥 좀, 드라마의 기본적인 컨셉이나 몇몇 장면만 보고서 나오는 '평론'은 그만 보고 싶다. 평론에는 성의가 필요하다. 무슨 성의? 평론 대상을 참을성있게 끝까지 보고 판단하는 성의. 한때 그런 식으로 평론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작품 텍스트 그 자체는 아랑곳없이 자신이 '추앙'하는 이론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품을 동원하는 사람들. 이런 경향에 일찌감치 멀미를 느껴 스스로도 등단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절도 있었다. 꼭 그 시절의 기시감이 드는 요즘이다.
드라마가 없어도 되는 논평은 그냥 드라마 거론하지 말고 하자. 드라마에 대한 논평은 이 드라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자. 자신의 도그마를 타인에게 강조하기 위한 용도로 누군가의 저작물이나 혹은 이 저작물을 경험할 소비자의 '기회'를 빼앗는 짓 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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