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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화제이자 논란이 되고 있는 포옹 장면. '모자무싸'에는 자신이 잘할 수 있을 까 두려워하는 예비 감독 황동만을, 변은아가 니트 속으로 집어 넣어 껴안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부럽다는 사람도 있고, 기괴하거나 역겹다는 사람도, 아름답거나 감동적이라는 사람도 있다. 변은아는 두려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어린 자신을 껴안듯이, 눈 앞에 있는 그를 안아준다. 그 순간, 내면의 어린 아이, 어릴 적 두려움에 떠는 자기 자신이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도망친 어머니 대신, 자신이 어머니의 자리에 선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나의 아이가 대여섯살 무렵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내와 내가 아이랑 늘상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던 때였는데, 문득, 아이에게 그런데 사랑이 뭐야? 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답에 잠시 멍해졌다. 사랑이란 복잡한 게 아니었다. 안아주고 싶으면, 언제든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의 최고의 순간은 '성교'가 아니라 '부동의 껴안음' 즉 포옹이라고 말한다. 그는 포옹에 대해, "우린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자지 않고 잠 속에 있으며, 잠들기의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의 시간이요, 나를 고정하고 마비시키는 목소리의 순간이요, 어머니에게로의 되돌아감이다."라고 하면서, 이 포옹 안에서는, "모든 욕망은 결정적으로 충족된 것처럼 보여 폐기된다."고 말한다.

통상의 로맨스 작품이라면, 남여가 서로에게 달려들어 키스라도 퍼붓고 날밤이라도 새야겠지만, '모자무싸'에서는 포옹으로 끝난다. 포옹은 욕망을 폐기한다. 포옹은 그 자체의 안온함, 충만함 속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더 이상 무언가를 욕망해야겠다고 발버둥치지 않게 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욕망한다는 건, 그만큼의 결핍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포옹 안에서는, 모든 불안, 결핍, 도망치고자 하는 절실함이 폐기된다. 우리는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생에 한 번도 '안온함'을 느껴본 적 없던 황동만이 안온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순간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포옹의 순간들에 눈물이 난다. 영실이가 달려가 황진만을 꼭 안아준다면, 황동만이 죽으려 하는 황진만을 꼭 안아준다면, 8인회의 누구든 서로가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에 다가가 그를 안아주는 '부동의 껴안음'을 실현한다면, 그 모든 순간이 감동적일 것이다. 나의 아들은 초2인데, 아직도 나를 자주 안아준다. 나는 아이 품에 안겨 있으면 잠시,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이나 걱정을 잊는다. 포옹에는 기이한 힘이 있다. 평생을 내달려 가고 있는 질주를 멈추게 하는, 여기 멈춰서도 된다고 말하게 하는, 부동의 힘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는 순간이야말로, 사랑이 '완전한 결합'에서 잠시 머무는 충일함의 시간이라 말한다. 어쩌면, 삶이란 그 잠시의 포옹,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안온함, 다시 현실로 돌아가 부딪히기 직전에 쉴 수 있는 그 충일함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저 장면을 보고 생각한 건, 아, 많이 포옹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아내도, 아이도 많이 안아주고, 어머니 아버지도 만나면 안아주고, 친구들도 싫어하지만 않으면 안아줘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은 모두 반쯤 어린 아이로 살아가고, 때론 다른 누구의 엄마나 아빠가 되고, 다른 누구의 자식이 된다. 구원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과거에 있다. "안아줘!"라며 달려가던, 잊혀진 어느 시절에. 아이가 사랑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나를, 내 안의 어린 나를 안아주는 일이기도 했다.

* 사진 - jtbc 모자무싸 캡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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