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의하면 이 병이 가장 먼저 발병한 곳은 미국이었다.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의 한 육군 캠프.
바이러스가 침범한 병사들의 폐는 체액으로 채워졌다. 광대뼈에서 시작한 반점이 몇 시간 만에 온 몸을 덮었다. 사람들은 이 병을 보라색 죽음 Purple death이라 불렀다.
간호사들은 실려온 환자의 발부터 살폈다. 이미 발이 검게 변한 이는 치료도 없이 곧바로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로 옮겨졌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인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최소 5천만 명이 죽었다. 미국에서만 67만 여명이 사망했다. 1차 대전,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죽은 미국인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하지만 전쟁 중이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병의 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언론을 엄격히 검열했다. 병이 언론에 오른 유일한 나라는 참전국이 아닌 스페인이었다. 그래서 이 병은 스페인 독감으로 이름 붙여졌다. 누군가 말했다. "이 병이 스페인 독감이 된 것은 스페인 언론이 제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36구가 적정 수용인원인 시립 영안실에 500여 구가 밀려들었다. 관이 모자라 전차를 만들던 공장이 조잡한 나무 상자를 찍어냈고 어렵게 도착한 관은 무장 경비 아래 운반되었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며칠씩 집 안에 방치되자 당국은 짐수레를 거리로 보내 '죽은 이를 밖으로 내놓으라' 외치게 했다. 필라델피아에서만 몇 주만에 1만 3천여 명, 뉴욕은 3만 3천여 명을 묻었다.
사람 대신 공포가 일자리를 채웠다. LH 섀터크 조선소에서는 노동자의 54%만이 출근했고 그로턴 철공소에서는 41%만이 출근했다. 공포로 거리도 텅 비었다.
1918년 빈의 황금기도 스페인 독감으로 사그라들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쓰러졌고 가을에는 그의 제자 에곤 실레가 28세에 세상을 떠났다. 실레보다 사흘 앞서 임신 6개월이던 그의 아내가 숨졌다. 그래서 빈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실레의 그림 <가족 Die familie>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았다.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베버도 이 병으로 죽었다.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도 이 병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재앙은 멀리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 비레비그 미션으로까지 퍼졌다. 1918년 11월, 닷새만에 이 병으로 마을 주민의 85%가 사망했다. 주민들은 언땅 아래 시신을 집단 매장했다.
1951년, 25살의 의학도 요한 훌틴이 얼어붙은 바이러스를 되살리겠다는 꿈을 품고 무덤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46년 후인 1997년, 72세의 훌틴은 한 편의 논문을 읽었다. 분자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거 팀이 1918년에 죽은 병사의 조직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학자에게 편지를 써 그 무덤의 폐조직을 되살리자고 설득했다.
훌틴은 저금에서 3200 달러를 꺼내 아내의 정원용 가위를 챙겨들고 알래스카로 떠났다. 주민 네 명의 도움으로 땅 속 2미터에서 한 이누이트 여성의 시신을 찾았다. 그녀의 폐는 80년 동안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토벤버거 팀은 그녀의 폐에서 나온 바이러스 유전체를 해독했고 2005년에는 바이러스를 재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멸종된 병원체를 인위적으로 되살린 최초의 사례였다. 바이러스의 정체는 바로 조류 인플루엔자였다.
완전히 재구성된 1918년 바이러스는 빠르게 복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감염 4일째에 쥐의 폐 조직에서 발견된 1918년 바이러스의 양은 비교 대상인 재조합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중 하나가 생성한 양보다 39,000배나 많았다.
토벤버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바이러스는 '모든 팬데믹의 어머니'였다. 1957년의 독감도, 1968년의 독감도, 2009년의 신종플루도, 우리가 해마다 맞는 독감 백신의 원인 바이러스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서 나온 후손이었다.
바이러스학자들은 토벤버거의 연구가 수년간 가장 큰 업적이자 수많은 생명을 구할 발견이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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