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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과 서커스

그의 이름은 오타 벵가. 이 청년은 아프리카 콩고에서 백인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리고 1906년 미국 브롱크스 동물원에 유인원과 함께 전시됐다. 위 사진은 바로 그 사진. 당시 뉴요커들 수십 만명이 동물원을 방문해 청년과 유인원을 구경하느라 장사진을 이뤘다. 나중에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서 나오게 되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동물원은 자본주의의 승리, 또는 식민 지배의 상징이다. 15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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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과 서커스

그의 이름은 오타 벵가. 이 청년은 아프리카 콩고에서 백인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리고 1906년 미국 브롱크스 동물원에 유인원과 함께 전시됐다.

위 사진은 바로 그 사진. 당시 뉴요커들 수십 만명이 동물원을 방문해 청년과 유인원을 구경하느라 장사진을 이뤘다. 나중에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서 나오게 되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동물원은 자본주의의 승리, 또는 식민 지배의 상징이다. 15세기 말 이후, 유럽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등 나머지 세계를 식민 지배했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유색인종, 자연, 여성을 식민화화면서 시작된 체제다.

동물원의 형태가 맨처음 거론됐을 땐 '동물 도감'에 가까웠다. 고양이, 유대류 등 다양한 동물들을 분류, 수집, 통제하는 표본 도감을 특정 공간에 전시하고자 했다. 자연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19세기 중반부터 동물원의 현재적 형태가 구축되는데, 제국주의의 '지리학'을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장소로 기능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건 석탄을 장착한 증기선이 생산됐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몸집이 큰 동물들을 유럽과 미국으로 실어나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유럽과 미 제국의 지배자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동물, 식물, 그리고 선주민들을 끌고 와 전시하기 시작했다. 자, 저 먼 식민지의 이국적이고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라, 피부가 까만 짐승 같은 흑인들을 구경하라, 이것이 제국의 힘이다. 유럽인들은 흑인들을 모두 '피그미'라고 통칭하며 우리에 가둬 전시했다.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힌 동물과 인간이 백인들의 볼거리와 비웃음을 위해, 자본과 제국의 승리를 위해 철창 우리에 갇히게 된 것이다.

동물원과 함께 유행했던 게 '서커스'였다. 동물원이 동물과 선주민들이 얼마나 피동적이고 순응적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장소였다면, 서커스는 '문명화'를 증명하는 장소였다. 저 멍청한 동물들을 잘 훈육하면 길들일 수 있구나.

한편, '노스탤지어'가 관용적 표현으로 굳어진 게 19세기 중엽부터다. 전 세계에 납치된 흑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 단어다. 또 동물이라고 왜 자신이 납치되어 온 고향의 냄새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흙과 풀과 공기 냄새를 왜 기억하지 못할까. 노스탤지어란 말 속엔 그렇게 뿌리 뽑힌 존재들의 상실감이 켜켜이 묻어 있다.

바로 이렇게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권위를 사회화하고, 자연과 남반구를 타자화하는 시민 교육을 시행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간이 동물원이었다. 마지막 빙하가 물러나고 홀로세가 시작되면서 인간들이 일부 동물을 가축화했지만, 또 지배 엘리트들이 서로의 정치적 결속을 위해 자국의 이국 동물들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지만, 이렇듯 특정 지역의 동물들을 대량으로 납치해 대중에게 전시하며 인간의 우위를 전면화했던 적은 19세기가 처음이다.

1906년 브롱크스 동물원에 함께 나란히 전시된 흑인 청년 오타 벵가와 유인원. 사진상으로 남은 가장 선명한 장면이다. 수십 만명의 백인들이 낄낄거리며 구경했고, 일부는 철창 너머로 돌이나 먹을 걸 집어던지기도 했다.

이렇듯 동물원은 인종주의와 종차별이 동일선상에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공간이다.

늑구가 생포돼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쉰다. 그런데 여기에서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여전히 동물원이다. 늑구는 왜 탈출했을까? 물론 그 속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19세기 고향에서 붙잡혀 유럽의 동물원에 갇혔던 동물들이 고향 냄새를 그리워했듯, 아무리 동물원에서 태어났다고 해더라도 늑구 역시 유전자에 새겨진 고향의 냄새, 훨훨 쏘다니고 싶은 노스탤지어를 느꼈을 것이다.

동물은 구경꺼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동물원은 없애야 한다. 동물원을 없애도 동물과의 교감을 충분히 형성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감금된 구경꺼리로 전락한 동물이 아니라, 거리를 띄운 채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에서 외려 더 많은 생태적 교감이 발생한다.

기존의 동물원은 동물 보호와 치유 센터로 전환하고, 동물원 철창과 구경꺼리는 이제 그만 좀 없애자. 그게 늑구 사태에서 얻을 유일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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